신 타이포그래피 혁명가 얀 치홀트
신 타이포그래피 혁명가 얀 치홀트
얀 치홀트 Tschihold, Jan
1902년 작센주(州) 라이프치히에서 타이포그래피 디자이너이자 간판 화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1919년 라이프치히 아카데미에서 델리치Herman Delitsch를 사사한 뒤, 드레스덴 공예학교를 졸업하였다. 이후 인쇄회사 디자인실에서 일하던 중 1921년부터 미술공예학교와 인쇄기술학교에서 레터링과 타이포그래피를 강의하였다. 1923년 8월 바이마르에 있는 조형학교 바우하우스에서 열린 전시회를 보고 감명을 받아 이때부터 새로운 구성주의 디자인을 선보이기 시작하였다. 1928년 첫 저서 새로운 타이포그래피 Die Neue Typographie를 출간한 뒤, 포토아우게 fotouge (1929), 포토텍 Fototek (1930), 레이아웃 드로잉의 기술 (1932) 등을 출간하였다. 포토아우게 는 76컷의 포토그래피를 선집 형식으로 구성한 책으로, 소문자만으로 구성되어 있다.
1933년 나치에 의해 반 독일적 타이포그래피를 만들었다는 이유로 교직에서 쫓겨난 뒤, 6주 간의 보호감호 끝에 가족을 데리고 스위스 바젤로 이주해, 1974년 죽을 때까지 스위스에서 살았다. 1935년 타이포그래피의 구성 Typographische Gestaltung, 1941년 책으로 보는 활자의 역사 Geschichte der Schrift in Bildern를 출간하였고, 1945년 미국그래픽아트협회(AIGA) 금메달을 받았다. 같은 해 영국 왕립미술학회로부터 명예 왕실 산업디자이너 칭호를 받았고, 1947년부터는 영국 펭귄북스의 미술감독을 맡아 전통적 타이포그래피를 부활시키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1956년에는 타이포그래피 레터링 미술서적 부문 최고상인 구텐베르크상을 받았다. 그밖에, 한 시간에 볼 수 있는 인쇄 디자인(1930), 식자공들을 위한 레터링(1931), 책을 위한 디자인 Im Dienst des Buches(1947) 등이 있다. 비대칭 타이포그래피의 창조자, 전통적 타이포그래피를 현대적 타이포그래피와 조화시킨 디자이너로, 20세기의 대표적인 그래픽 디자이너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힌다.
참고_ 레터링이란? 오늘날에는 디자인 용어로서 일반적으로 디자인의 시각화를 위해 문자를 그리는 것, 또는 그려진 문자를 말한다. 이 경우 문자에 의해 성립되는 언어 본래의 의미뿐만 아니라, 자체字體를 고려한 조형造形이나 색채에 의해 보다 풍부한 정보내용을 전달할 수 있다. 이 가운데는 로고타입이나 칼리그래피 (서예 나 펜글씨처럼 핸드스크립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며 컴퓨터 자판에서 볼 수 있는 기존의 활자를 이용하지 않고, 직접 손으로 쓰는 것을 말한다) 등이 포함된다.
◉얀 치홀트 타이포그래피의 시작
얀 치홀트의 출생 환경을 보면 당시 출판업과 인쇄업이 상당히 발달한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났고, 얀 치홀트의 아버지는 사인제작자 지금의 레터링 아티스트 셨 기 때문에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레터링을 배우고 그것에 대한 안목도 키어왔다. 얀 치홀트는 열두 살이 되던 해에 라이프치히에서 열린 <국제 그래픽 아트전International Exhibition of the Graphic Arts>에서 훌륭하게 디자인된 책과 서체들을 경험한 좋은 기회를 갖게 된다. 또 그에게 그 해 구입한 인쇄 잡지 <츠비벨피슈>의 책에 관한 특별호는 얀 치홀트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주게 되면서 예술가의 꿈을 갖게 된다. 하지만 그의 부모는 예술가의 삶은 불안정하다는 인식이 강해서 대신 미술 교육자가 되기를 권하게 되고 그가 열네 살 때 라이프치히 근교의 그리마에 위치한 교사 연수학교로 보냈다. 하지만 그 곳에서 도 그는 시간이 날 때마다 레터링을 공부하면서 오래된 활자 견본집에 실린 고전적 서체들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었고 이러한 경험을 통해 활자 디자이너가 되겠다고 결심한다.
그리고, 열일곱 살 때 라이프치히의 그래픽 아트와 서적 제작 아카데미에서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하게 되고 스물한 살이 되던 해에 그는 인생의 큰 전환점을 맞게 되는데 바로 바이마르 바우하우스의 첫 번째 전시회에서 현대 미술과 디자인, 활자에 북 디자인에 그것들이 실제로 적용된 모습에 큰 충격을 받게 되고, 그를 완전히 새로운 세상으로 이끌게 된다.
◉바우하우스의 새로운 타이포그래피운동의 전개
구성주의자였던 라즐로 모홀리-나기는 1923년 바우하우스 전시회의 카탈로그에서 강한 대비와 대담한 색의 사용, 절대적인 커뮤니케이션의 명확함을 골자로 하는 타이포그래피 이론을 선언한다. 그는 자신의 포스터디자인에서 타이포-포토라는 새로운 그래픽 표현 방법을 보여준다.
◉얀 치홀트 타이포그래피의 시작
얀 치홀트의 출생 환경을 보면 당시 출판업과 인쇄업이 상당히 발달한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났고, 얀 치홀트의 아버지는 사인제작자 지금의 레터링 아티스트 셨 기 때문에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레터링을 배우고 그것에 대한 안목도 키어왔다. 얀 치홀트는 열두 살이 되던 해에 라이프치히에서 열린 <국제 그래픽 아트전International Exhibition of the Graphic Arts>에서 훌륭하게 디자인된 책과 서체들을 경험한 좋은 기회를 갖게 된다. 또 그에게 그 해 구입한 인쇄 잡지 <츠비벨피슈>의 책에 관한 특별호는 얀 치홀트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주게 되면서 예술가의 꿈을 갖게 된다. 하지만 그의 부모는 예술가의 삶은 불안정하다는 인식이 강해서 대신 미술 교육자가 되기를 권하게 되고 그가 열네 살 때 라이프치히 근교의 그리마에 위치한 교사 연수학교로 보냈다. 하지만 그 곳에서 도 그는 시간이 날 때마다 레터링을 공부하면서 오래된 활자 견본집에 실린 고전적 서체들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었고 이러한 경험을 통해 활자 디자이너가 되겠다고 결심한다.
그리고, 열일곱 살 때 라이프치히의 그래픽 아트와 서적 제작 아카데미에서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하게 되고 스물한 살이 되던 해에 그는 인생의 큰 전환점을 맞게 되는데 바로 바이마르 바우하우스의 첫 번째 전시회에서 현대 미술과 디자인, 활자에 북 디자인에 그것들이 실제로 적용된 모습에 큰 충격을 받게 되고, 그를 완전히 새로운 세상으로 이끌게 된다.
◉바우하우스의 새로운 타이포그래피운동의 전개
구성주의자였던 라즐로 모홀리-나기는 1923년 바우하우스 전시회의 카탈로그에서 강한 대비와 대담한 색의 사용, 절대적인 커뮤니케이션의 명확함을 골자로 하는 타이포그래피 이론을 선언한다. 그는 자신의 포스터디자인에서 타이포-포토라는 새로운 그래픽 표현 방법을 보여준다.
그러나 바우하우스의 이념은 이후 독일보다는 오히려 미국에서 꽃을 피우게 된다. 이는 설립자 그로피우스가 하버드대학교 건축부장으로, 마지막 교장이었던 미스 반 데어 로에가 일리노이공과대학 건축학부장으로 각각 부임하고, 모호이너지가 시카고에 뉴바우하우스를 개설한 데 힘입은 바 크다. 즉 이들로 인해 미국 동부에서는 하버드대학교를 중심으로, 중부에서는 일리노이공과대학을 중심으로 건축의 양대 산맥을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미스 반 데어 로에는 위원회를 결성해 시카고의 건축가들을 일리노이공과대학으로 초빙, 시카고 철골 고층 건물의 신기원을 마련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렇듯 바우하우스는 1933년에 완전히 폐쇄되기는 했지만, 이 곳에서 제작한 제품들은 많은 곳에서 모방되었다. 또 일상생활에 사용하는 물건들을 단순하고 편리하게 설계하는 방법 역시 바우하우스의 영향을 받은 것이며, 교수법과 교육이념 역시 세계 곳곳에 널리 보급되어 오늘날에도 대부분의 예술 교육과정에 포함될 만큼 현대 조형예술 분야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신 타이포그래피로서의 얀 치홀트에게 큰 영향을 끼친 인물 바우하우스 전시회를 즈음하여 만난 여러 선구적 예술가들 중 에서 특히 엘 리시츠키티El lissitzky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엘 리시츠키는 독일에서 받은 건축 교육을 바탕으로 그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 말레비치Mallevich의 절대주의 회화 양식의 형태 개념과 공간 개념을 사회를 위한 예술인 실용적 디자인에 적용하고자 했다. 그의 이성적, 절제적 작업의 배후에는 현대 과학의 무한한 가능성과 아름다움을 믿는 기계 미학이었다. 라시츠키 는 동료 예술가들의 작업에 항상 관심을 가져 주었고 얀 치홀트가 1925년 타이포그래피의 원리를 발표 했을 때 그에게 격려의 편지를 보내주기도 했다. 참고_ 엘 라시츠키El lissitzky에 대해 독일의 다름슈타트에서 건축학을 공부하고 귀국. 1919년 M.샤갈에 의해 비테프스크에 있는 혁신적인 학교의 교사가 되었는데, 이 학교에 있던 절대주의 운동의 창시자이며 화가인 말레비치Mallevich의 영향을 받았다. 그가 1919년부터 ‘프라운Proun’이라는 제목으로 그리기 시작한 기하학적 추상화 연작連作이 구성주의 운동에 기여하였다. 1921년 모스크바 국립미술학교 교수가 되었으나, 그해 말에 소비에트 당국이 현대예술을 반대하였으므로 독일로 떠났다. 여기서 헝가리의 화가이자 디자이너인 L.모호이너지를 만났다. 1929년 모스크바로 돌아와서도 공간구성의 실험을 통해 판화, 포토몽타주, 건축 등에 새로운 기법을 발표하면서 서유럽에 영향을 끼쳤다. ◉1925년, 얀 치홀트 최초의 타이포그래피의 원리 이론 타이포그래피가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사회적 기능을 다하기 위해서는 구성요소들 간에 조직이 이루어져야 한다. 조직에는 내부조직과 외부조직이 있는데 내부조직은 커뮤니케이션 내용 그자체이고 외부조직은 그 내용에 적절한 인쇄 방법과 자료들의 사용이다. 내부조직 즉 커뮤니케이션의 내용이 글자, 숫자, 기호, 글줄과 같은 타이포그래피의 기본 요소들을 규정 하고 신 타이포그래피의 기본 요소에는 사진이 포함된다. ◉신 타이포그래피로서의 얀 치홀트에게 큰 영향을 끼친 인물 바우하우스 전시회를 즈음하여 만난 여러 선구적 예술가들 중 에서 특히 엘 리시츠키티El lissitzky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엘 리시츠키는 독일에서 받은 건축 교육을 바탕으로 그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 말레비치Mallevich의 절대주의 회화 양식의 형태 개념과 공간 개념을 사회를 위한 예술인 실용적 디자인에 적용하고자 했다. 그의 이성적, 절제적 작업의 배후에는 현대 과학의 무한한 가능성과 아름다움을 믿는 기계 미학이었다. 라시츠키 는 동료 예술가들의 작업에 항상 관심을 가져 주었고 얀 치홀트가 1925년 타이포그래피의 원리를 발표 했을 때 그에게 격려의 편지를 보내주기도 했다. 참고_ 엘 라시츠키El lissitzky에 대해 독일의 다름슈타트에서 건축학을 공부하고 귀국. 1919년 M.샤갈에 의해 비테프스크에 있는 혁신적인 학교의 교사가 되었는데, 이 학교에 있던 절대주의 운동의 창시자이며 화가인 말레비치Mallevich의 영향을 받았다. 그가 1919년부터 ‘프라운Proun’이라는 제목으로 그리기 시작한 기하학적 추상화 연작連作이 구성주의 운동에 기여하였다. 1921년 모스크바 국립미술학교 교수가 되었으나, 그해 말에 소비에트 당국이 현대예술을 반대하였으므로 독일로 떠났다. 여기서 헝가리의 화가이자 디자이너인 L.모호이너지를 만났다. 1929년 모스크바로 돌아와서도 공간구성의 실험을 통해 판화, 포토몽타주, 건축 등에 새로운 기법을 발표하면서 서유럽에 영향을 끼쳤다. ◉1925년, 얀 치홀트 최초의 타이포그래피의 원리 이론 타이포그래피가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사회적 기능을 다하기 위해서는 구성요소들 간에 조직이 이루어져야 한다. 조직에는 내부조직과 외부조직이 있는데 내부조직은 커뮤니케이션 내용 그자체이고 외부조직은 그 내용에 적절한 인쇄 방법과 자료들의 사용이다. 내부조직 즉 커뮤니케이션의 내용이 글자, 숫자, 기호, 글줄과 같은 타이포그래피의 기본 요소들을 규정 하고 신 타이포그래피의 기본 요소에는 사진이 포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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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명 : 신 타이포그래피 혁명가 얀 치홀트
지은이 : 김현미 지음
출판사 : 디자인하우스 펴냄
http://blog.naver.com/zego1/100012275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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